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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소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좀 더 긴 제목: (회사를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어떤 사소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나는 이 일로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행으로 옮긴 이후로, 이 에피소드를 머리 속에 떠올릴 때마다 마음 속에 다른 감정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인지 이게 슬픈 이야기인지 화나는 이야기인지 웃긴 이야기인지조차 이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주변에 얘기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유쾌하지도 않고 좀스러운 이야기다보니 이제는 더 이상 꺼내놓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한참 잊고 지내다가 다시 문득 이 에피소드가 떠오르면 아아 세상에 다시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돼(?)하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라, 텍스트로 적어 놓으면 이런 혼란스러운 기분을 좀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어 본다.

일단 2018년 초로 돌아가서, 당시의 내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회사에는 2015년에 합류를 했고, 처음 회사에 합류할 당시 회사에는 나 말고 두 명의 엔지니어가 있었고 (한 명의 엔지니어가 더 있긴 했지만 개발 쪽은 아니었다),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간 첫 번째 시니어 엔지니어였다. 만 3년 동안 그 회사에서 근무를 했고, 다양한 일을 했다. 초반에는 iOS, 안드로이드, tvOS 앱에 관여했고, 비디오 컨텐트 파일의 내부 전송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작업을 했고, 그 와중에 터져나가는 PHP 사이트를 안정시키며 스케일 업을 하는 작업을 했고, PHP 사이트를 Django로 마이그레이션 했고, 그 외에 기억이 안 나는 사소한 작업들도 많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엔지니어링 관련된 것이면 대부분 관여를 했다. 비디오 스트리밍 회사였으나 미디어 처리 관련 전문가는 없었고, 업무는 이 사람이 바쁘면 저 사람이 대신하는 식으로 굴러갔다.

… 말하자면 3년 내내 물이 새는 제방에 팔뚝을 꽂고 버티는 기분이었다.

그 3년 동안 어디를 가든지 늘 백팩을 들고 다녔고, 백팩에는 늘 랩탑이 있었다.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어디에서든 시스템을 들여다 봐야 했었다. 어느 날 시스템 대신 나를 들여다보니 번아웃이 되어 있었다. 번아웃이 오기 이전에 이미 회사 내에서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기대는 접은 상태였고, 주변에는 당장 이 회사를 떠나라는 신호만 가득했다. 물론, 단순히 업무량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상황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튼 그런 상황이었다.

이제 그 사소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회사에서 내게만 제공하는 혜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혜택은 식대 제공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상황이 이 혜택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항상 야근을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식대를 모두 비용 처리를 하지는 않았었다. 가급적 점심이든 저녁이든 회사 일을 하는 동안에 밥을 먹을 경우에 식대로 처리를 하곤 했다(예외적으로는, 외부 개발자를 만날 일이 있거나 할 때 밥을 사는 정도). 야근을 하는 동료가 있으면 같이 밥을 먹고 내가 대신 비용 청구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나는 술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 비용은 그냥 문자 그대로 식대였다. (밥값과 술값의 차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테니 넘어가자)

어느 시점에서인가 비용을 줄인답시고 식대 청구를 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직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식대 청구 안된다는 공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그나마 나는 시니어 엔지니어라고 봐 주는 모양이었다. 밥 먹을 돈 아껴서 회사 운영이 잘 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나도 알아서 식대 청구를 자제했다. 사실 그 때에는 야근할 일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 시스템에 올린 식대 청구 신청에서 처리가 되지 않은 영수증 몇 장을 발견했다. 거부 사유도 적혀 있지 않았고, 그냥 거부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뭔가 착오가 있나 해서 환급 처리를 하는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고 재무 담당 임원이 시킨대로만 처리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재무 담당 임원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회사 근처에서 한 식사가 아니라서 식대 청구를 반려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랬다. 그 영수증은 휴가를 가서 호텔에 묵었던 날, 장애가 발생해서 호텔방에서 시스템을 점검한 다음 먹었던 늦은 저녁에 대한 영수증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에 회사에서 내게 합당한 조건을 제시했더라면(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회사에 좀 더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하고 생각을 고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임원은 나를 사사로이 회사 일과 관련도 없는 식대를 청구할 사람으로 봤던걸까, 뭔가 맘에 안 들어서 꼬투리를 잡고 싶었던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왜 회사에서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밥을 먹고 식대를 청구했지 싶었던걸까.

물론 이 사건이 없었더라도 회사를 떠나긴 했을 것이었다. 다만, 이렇게 어디 얘기도 못하며 좀스럽게 괴로워하는 에피소드가 생기진 않았겠지만.

왜 이런 사소한 일로 이렇게 나는 화가 났고 지금까지도 화를 내고 있을까하고 회사를 떠난 뒤로도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인정 욕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회사에서 인정해주는 말은 그저 립서비스 뿐, 큰 틀에서 엔지니어링에 관련된 결정을 내릴 권한이나 책임이 내게 주어진 적은 없었고, (내가 있었던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금전적인 보상도 내 커리어 수준의 평균에 미친 적이 없었다. 회사 외적으로는 기술 커뮤니티에 참여할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회사의 상황을 배제하고 나에 대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인정 욕구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인이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가치가 있는 일인가.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평가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외부의 창을 통해 평가받기를 원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주변과 세상이 나에게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알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면,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의 인정 욕구에 대한 회사의 답은 이렇게 진행된 것이다. 권한의 부재. 보상의 부재. 그리고 신뢰의 부재.

그 영수증 식대 한 장의 반려 처리로, 나는 휴가 가서 회사 돈으로 저녁을 사 먹는 좀스럽고 뻔뻔한 인간이 되었다. 이 사소한 사건을 통해 나는 진심으로 모욕당했다고 느꼈고, 회사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3년 내내 몸에서 떼놓지 않던 랩탑을 휴일에는 집에 두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임원도 지금은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앞으로 마주칠 일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 회사를 떠나게 될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내 처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